"너는 나한테 강의실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어지간해서는 TV 드라마를 통 보지 않던 내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다음 회를 기다리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극 중에서 오는 재미뿐만은 아니다. 한겨울 칼바람이 이는 절박함 속에서도 진실을 밝혀내려는 그 순수함이 애틋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부당함에는 정치적으로, 덜 낭만적으로 대항해서라도 불의와 권모술수에 맞서는 '우당탕탕'도 볼만하다. 그리고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은 틈을 찾아낼 때 홀연히 나타나는 고래도 참 예쁘다.

이른 봄날의 햇살이 매화 향기를 불러온 격이다.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가 봄날 햇살의 사랑으로 피어나 그 향기를 천하에 내뿜는 것이다. 잎이 나기도 전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사랑이 뭐길래.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모든 사람 각자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화상인 '바보야'를 남기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제일 바보 같지 않으셨던 분이 스스로 바보라 하시니 진짜 바보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그분이 선종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다. 맞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언제나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단다. 바보같이.

일찍이 굉지 화상은 이런 법어를 남기었다.

"칼날끼리 부딪힐 때도 피하려고 하지마라 / 솜씨 좋은 사람은 불 속의 연꽃 같아 / 하늘이라도 찌를 큰 뜻 완연하나니"

양인교봉(兩刃交鋒)의 상태에서도 마음을 다스리고 길을 잃지 않는 바탕에는 모두가 하나라는 마음이 있다. 목숨을 거는 위태로움 앞에서도 분별심을 버리고 너와 내가 하나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하던가! 사랑은 진흙 속의 연꽃을 불 속의 연꽃으로 승화시킨다.

인천 장애인 노인회장이셨던 정의성 선생님께서 어제 소천하셨다. 그분이야말로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시다. 어릴 적에 화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단하시고도 검도를 하고 싶으셨던 선생님.

"너는 검도를 할 수가 없다. 가르칠 수 없으니 돌아가라!."는 검도관장님을 몇 날 며칠을 졸라 허락을 받아내시고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단다. 나무 의족을 착용하신 채로 수십 년을 꾸준하게 수련 정진하시어 마침내 검도 7단에 오르셨다. 후학들의 스승으로서 지도자 생활도 하셨으며 위풍당당한 웅변가로서도 이름을 날리셨다. 전국검도연합회의 실무 부회장, 초대 전국장애인검도회 회장까지 역임하시면서 검도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으며 하늘이라도 찌를 듯한 큰 뜻을 지니고 살라고 격려해주셨다. '너와 나는 하나, 다를 것이 없다.'라고 하시던 선생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 속의 연꽃'이시다.

양인교봉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경쟁자인 우영우의 학업과 성적을 위하여 배려를 하여준 최수연은 '봄날의 햇살'이 맞다. 명성을 얻기 위해 배신을 하고 이익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져 자신을 속이는 서릿발 같은 세상에서도 꽃을 피우게 하는 '봄날의 햇살'이 맞다. 흔들릴 때마다 앞에만 서면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하여주신 정의성 선생님께서도 '봄날의 햇살'이시다.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나는, '봄날의 햇살' - 그 사랑에 언제 향기로 보답을 할 수 있으려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른 모든 일은 사랑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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